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운영하는 무안읍 ‘공일공안경’
과묵한 배려와 온화함 … “코로나여도 안경은 써야제”

도시에서 콘텍트렌즈를 잃어버렸다. 무안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허겁지겁 짐을 싸다가 어딘가에 떨어뜨린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당분간은 안경을 쓰기로 했다. 하지만 날이 흐려지자 두어 걸음에 한 번씩 안경에 김이 서렸다. 걷다 말고 멈춰 서서 습기를 닦아내는 일이 번거로웠다. 결국 새 콘텍트렌즈를 사러 안경점에 들렀다.

낙지골목에서 은행이 모여있는 중앙로로 나오면 비슷한 안경점들이 띄엄띄엄 있다. 전에 방문한 ‘공일공안경’은 낙지골목에서 더 아래에 있다. 걷는 사이 또 안경에 김이 서렸다. 가까운 가게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냉큼 들었다. 어차피 비슷하지 않을까? 하지만 결국 공일공안경을 골랐다. 조급해지는 한편으로 그 가게에서 느낄 느긋함이 기대됐다.

도시 젊은이는 모든 볼일이 5분 이내에 끝나는 가게에 익숙하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괘종시계가 울리고 종 울리는 소리만큼 시간이 천천히 간다. 점심시간에 방문하면 볼일을 다 보기까지 1시간가량 걸린다. 이곳에는 온화한 여유가 있다. 그 때문에 이곳을 다시 찾게 된다.

이곳은 시계방을 하던 아버지와 안경점을 하는 아들이 함께 운영한다. 지금은 주로 아들이 안경점 일을 보지만 여전히 가게 한쪽 벽면에 시계들이 걸려있다. 덕분에 가게 안에서는 초침 가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린다. 부자는 느리고 조용하게 말하고 TV에서는 흥얼거리듯 낮은 소리가 흘러나온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키가 작고 왜소한 노인이 말을 걸었다. 노인은 올해 95세인데, 놀랄 만큼 정정하며 성품이 온화했다. 회백색 눈은 사려 깊게 빛이 났다. 지금 아들이 부재중이라며 “식사하고 있으니까 잠깐 앉아서 기다려. 금방 온당께” 하셨다.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TV를 보며 시간을 죽였다. ‘특이한 사람들’의 일상을 밀착 취재하는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다. 어떤 여성이 화려한 과거를 그리워하며 고독해한다는 내용이다. 도시에 사는 이 여성은 스타벅스에 앉아 빵을 조각조각 찢고 있었다. 절반이 넘는 빵을 먹지도 않고 찢어서 접시에 버렸다. ‘입맛에 맞지 않는 건 안 먹어요. 버려요.’ 그 소리가 웅얼거리듯 뭉개졌다.

그때 노인이 비닐로 싼 주황색 한라봉을 불쑥 내밀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여. 이렇게 비닐에 싸면 오래오래 맛있게 먹을 수 있어요.” 혼자 먹는 음식은 갈기갈기 찢겨 버려지는데, 나누어 먹는 음식은 비닐에 싸여 손에서 손으로 왔다. 한 번도 입맛에 맞은 적 없는 음식이지만 노인이 건넨 한라봉은 싱그럽고 달아 보였다. 

공일공안경의 주인 손승호(64) 씨도 식사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는 과묵하고 몸가짐이 무거웠다. 말수가 적은 탓인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종잡기 어려운 분이었다. 그는 얼굴을 알아보는 듯이 “아, 엊그저께?”하고 말할 뿐이었다.

정말 얼굴을 알아본 것인지, 다른 손님과 착각한 것인지 아리송하지만 이내 편안해졌다. 아무렴 어떤가. 천천히 움직이는 듯한 공기가 머무는 이들의 시간마저 바꾸는 듯했다. 지난번 방문이 벌써 두어 달 전인데 그에게는 엊그제와 두 달 사이에 별 차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쓰고 있던 안경을 달라고 하더니 안경 도수와 시력을 측정했다. 이참에 안경도 맞추라고 권유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조마조마하게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그는 새 콘텍트렌즈를 꺼내며 “렌즈는 끼고 갈 것이여?”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다시금 말없이 새 렌즈 뚜껑을 열기 시작했다. 

지난번 ‘안경 도수가 영 잘못 잡혀 있다’고 말씀하신 게 떠올랐다. 안경을 점검하면서 안경 도수와 맨눈의 시력 차이가 심해졌는지를 확인하는 것 같다. 사려 깊음을 느낀다. 그는 새 콘텍트렌즈 뚜껑을 따는 데 애를 먹었다. 구석에서 아들을 지켜보던 노인이 책상을 뒤지더니 펜치를 꺼냈다. 그 전에 렌즈 뚜껑이 열렸다. 뚜껑은 경쾌한 소리를 냈다. 

작은 뚜껑을 여는 일에 펜치를 꺼내다니, 그 광경이 사뭇 유쾌하여 웃음을 참고 괜스레 말을 붙였다. “안경점에 손님이 많이 오세요”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코로나여도 안경은 써야 하잖아.” 아차, 그렇구나. 간단한 답변인데도 분명히 옳은 말이라 다시 웃음이 나왔다.

주인은 콘텍트렌즈 세척액을 두 개나 들려주었다.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는 게 옳지. 이대로 놔두느니 가져가서 쓰면 좋잖아.” 그렇게 ‘원 플러스 원’ 세척액을 받아들고 가게를 나서자 세상이 상쾌하게 보였다. 습기가 서리는 안경 대신 새 콘텍트렌즈를 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분명 다른 이유도 있다. 

공일공안경은 ‘시간의 방’처럼 오래된 시간을 붙잡아서 느긋하게 고아두는 신비한 가게다. 시계 소리와 TV가 송출하는 소리, 나직한 주인 부자의 말소리에는 마음이 평온해지는 마법의 주문이 걸려 있었다. 그러니 가게를 나설 때는 잠시 비밀스런 장소를 엿보았다가 다시 바깥세상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콘텍트렌즈 하나를 샀을 뿐인데 따뜻한 힘을 얻은 것 같았다. 

돌아가는 길, 가방 안에는 비닐에 싸인 한라봉이 있고 마음속에는 시계방 아버지와 안경점 아들의 온화한 여유가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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