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서 (시인, 무안학연구소 소장)

박관서 (시인, 무안학연구소 소장)
박관서 (시인, 무안학연구소 소장)

얼마 전에 마을의 한 어르신이 두꺼운 책 두 권을 전해주었다. 옛 한시와 한학에 관한 글을 국역한 『삼사재만록(三思齋漫錄)』과 『삼사재유고록(三思齋遺稿錄)』이었다.

십여 년 전에 월선리로 이사 온 후 자주 찾아뵙고 한시와 한문학 등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던 어르신들 몇 분이 계셨다. 이번 책 역시 조선말에서 근대기에 이르도록 한학과 문학을 하면서 본 청계 월선리에 본가를 두고 무안과 영암, 영광, 나주 등에서 서당 훈장 등을 한 삼사재(三思齋) 김재걸(金在杰) 스승이 남긴 책을, 김순상 어른이 생전에 국역을 해두었었고 역시 같은 제자이자 후손인 송산 김순권 선생이 펴낸 것이었다. 

우선 반가워서 펴본 책의 서문에는 ‘나는 재주도 덕도 없으며 머리가 백발이 되도록 농사일로 논과 밭둑을 돌아다니다 보니, 한 가지 일도 제대로 해 놓은 것이 없어서 가히 저술한 것이 잔편(殘編)들뿐입니다. 그를 통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 스스로에게나마 영향을 주고받으며 이날에 이르렀습니다. 다른 날에 후손들이 만일 날아다니는 벌레가 등불의 그을음을 본 것처럼이나마 여긴다면, 또 하나의 길잡이가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밝혔다. 

예나 지금이나 학문과 문학을 남에게 인정받거나 전문 영역화해서 위계화하는 것이 보통인 풍속에서, 소박하고 단단한 유가(儒家)의 학인이자 무안에서 활동하던 지식인으로서의 선비문인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그래서, 1896년에 출생하여 1977년에 임종하기까지, 무안 청계면 월선리를 근거지로 농사와 한학을 꾸준히 하면서 아울러 지속적으로 창작했던 시편들을 통하여 김재걸(金在杰) 어른의 근황을 간략히 짚어보기로 한다.

밤에 겸이포(兼二浦)를 떠나 / 도망쳐 달려 황주(黃州) 땅에 갔다. / 비와 우박이 펄펄 내려서 / 주점을 찾아 잠깐 쉬었다.(夜離兼二浦 / 逃走入黃州 / 雨雹紛紛下 / 暫尋酒店休) - 시 행황해도(行黃海道) 전문.

무엇보다 먼저 일제 강점기에 징용노무자로 끌려갔다가 도망치는 과정을 세심하게 기록한 시편들이 눈에 띄었다. 1942년 3월 18일에 강제 징용노무자로 황해도의 겸이포상공회사까지 끌려가 일하다 도망쳐 나와, 동년 5월 2일에 월선리 집으로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경험한 타지의 풍경과 체험을 통하여 쓴 시들이 전반부를 채우고 있다. 

이처럼 피식민지 국민이었던 조선인들에 대한 강제노역은 태평양 전쟁으로 전세가 급박해지면서 더욱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무안의 일제 강점기 근대건축물인 망운공항에 대한 징용의 기록이 나타나서 눈길을 끌었다.

뜻밖으로 무안군 망운 땅에 / 전쟁을 위한 비행장을 조성하네 / 산을 헐어 고랑을 메우는 힘든 일이 / 모든 이들의 창자를 끊어버리듯 하네(意外望雲坊 / 營成戰備場 / 斬山堙谷役 / 欲斷萬民腸) - 시 「送家兒出役飛行場」 전문.

1944년 겨울에 망운비행장 조성공사에 강제동원령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의 참상을 노래하고 있다. ‘일하는 이들의 창자를 끊어버리는 듯한’ 이러한 일제의 부도덕한 강제노역의 현장을 모두 세 편의 시를 통하여 고발하였다. 그것은 ‘나의 아들 삼 형제가 모두, 한 달여를 같이 노역에 나갔도다.(吾子三兄弟 / 月餘出役同)’에서 보듯이 극심하고 무도한 인권유린의 현장이었다. 그들이 또한 부족한 군수품을 채우기 위해 조선인의 농가에서 강제 공출해가는 상황도 시 「미곡공출(米穀供出)」 로 남겼다.

이처럼 『삼사재만록』이나 『삼사재유고록』과 같이 숨겨진 지역의 문헌에 실린 당대의 역사적 서정을 읽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수년 전에 진행된 무안 망운비행장 등에 대한 학술용역에서도 단지 남아있는 건축물의 형상이나 실태만을 조사하고 있다. 위와 같이 관련된 글의 내용을 통한 당시의 정황은 물론 당대 당사자들의 정서나 느낌은 현재의 입장에서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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