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 고막포 돌다리. 나주성 함락을 위해 농민군이 관군 일본군과 일전을 벌인 곳이다.
함평 고막포 돌다리. 나주성 함락을 위해 농민군이 관군 일본군과 일전을 벌인 곳이다.

필자가 두 번째 나선 길은 무안 동학 대접주 배상옥 장군의 자주의 길이다.

동학농민혁명의 잊혀진 영웅 배상옥장군이 1894년 걸어온 길이다. 무안읍에서 출발해 무안고 앞 붉은고개, 청천리 팽나무와 개서어나무 숲을 지나 청천사, 창포 바우배기를 지나 목포시 대양동, 함평 고막포 돌다리를 거쳐 무안읍 불무다리로 이어진 길이다.

붉은 고개. 수로를 이용하기 위해 창포로 향하던 농민군들이 창포에 도달하기 전 대기하던 관군 일본군과 맞이한 곳이다.
붉은 고개. 수로를 이용하기 위해 창포로 향하던 농민군들이 창포에 도달하기 전 대기하던 관군 일본군과 맞이한 곳이다.

옛 국도 1호선 길을 따라 현 무안고 앞 붉은 고개에 들어섰다. 

이곳이 어찌하여 붉은 고개가 되었는지 알게 된 것은 무안동학기념사업회 박석면 회장님의 설명을 듣고 나서였다. 

나주성을 공략하기 위한 고막포 일대 전투에서 대참패한 배상옥 장군과 농민군들은 전열을 다시 정비한다. 

일본군과 나주 수성군에 큰 타격을 입었던 배상옥 장군이 이끄는 주력부대 대부분은 장흥전투로 나아간다. 주력군에서 이탈되어 무안으로 이동한 남부 농민군들은 무안의 관군과 다시 일전을 치르게 된다. 

수많은 농민군이 학살되었던 피의 고개는 붉은 고개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타고 전달되었다. 
수많은 농민군이 학살되었던 피의 고개는 붉은 고개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타고 전달되었다. 

수로를 이용하기 위해 창포로 향하던 농민군들이 창포에 도달하기 전 대기하던 관군 일본군과 맞이한 곳이 붉은 고개, 즉 '피의 고개'다. 수많은 농민군이 학살되었던 피의 고개는 붉은 고개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타고 전달되었다. 

붉은 고개는 무안읍의 개발과정에서 사라졌지만 피바람이 몰아쳤을 황량한 들판에는 여전히 겨울바람이 매섭게 달려들었다.

동학농민혁명군의 붉은 고개 패전을 안고 청계면 청천리로 향했다. 

청천리 앞 팽나무와 개서어나무 숲 초입에서 청천사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청천리 마을 오랜 역사의 흔적을 고이 간직한 육송군락지 언덕을 비껴지나 청천사에 도착했다. 청천사는 청천리 마을 왼편 동북쪽 나지막한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청천리 마을 오랜 역사의 흔적을 고이 간직한 육송군락지 언덕을 비껴지나 청천사가 나온다.
청천리 마을 오랜 역사의 흔적을 고이 간직한 육송군락지 언덕을 비껴지나 청천사가 나온다.

달성배씨 가문 조상들의 위패가 모셔진 청천사에 2007년 후배농민운동가들의 노력으로 배상옥 장군의 위패가 모셔졌다.

2023년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청천사를 비롯한 무안군 소재 동학유적지에 안내표지판을 설치했다. 매우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청천사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자치기구 집강소로 운영되었다. 

또한 주목할 중요한 부분이 잊혀진 동학혁명의 영웅 배상옥 장군의 위패가 이곳에 모셔졌다는 것이다. 배상옥 장군의 위패가 모셔졌다는 것만으로도 동학유적지로서 의미가 큰 곳이 청천사다.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청천사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자치기구 집강소로 운영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청천사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자치기구 집강소로 운영되었다. 

청천리 집강소와 함께 운영되어졌을 훈련장 및 보급기지창이 이 일원에 존재했을 텐데 동학골이라는 구전된 지명만 남겨진채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입증된 지역은 없다. 

역사학자 이의화 선생의 기록은 배상옥 장군이 남산에서 봉기했다고 되어있다. 

현 초당대 자리가 동학골로 불리우고 있어 남산의 봉기장소 즉 훈련장으로 추측되고 있다.

청천사. 달성배씨 가문 조상들의 위패가 모셔진 청천사에 2007년 후배농민운동가들의 노력으로 배상옥 장군의 위패가 모셔졌다.
청천사. 달성배씨 가문 조상들의 위패가 모셔진 청천사에 2007년 후배농민운동가들의 노력으로 배상옥 장군의 위패가 모셔졌다.

청천사에서 발길을 돌려 청천리 팽나무와 개서어나무 숲에 이르렀다. 

청천리 팽나무와 개서어나무 숲은 처음 보는 이들에게는 생뚱맞다. 청천리 마을입구를 팽나무와 개서어나무 숲이 막고 있다. 

팽나무와 개서어나무 숲. 해안가 북서풍을 차단하기 위해 500여 년 전 달성배씨 조상들이 청천리 마을 입구에 심었다고 한다.
팽나무와 개서어나무 숲. 해안가 북서풍을 차단하기 위해 500여 년 전 달성배씨 조상들이 청천리 마을 입구에 심었다고 한다.

처음 보면 육지 한복판에 존재하는 기다란 방풍림 숲의 존재 이유가 이해가 안 된다. 

역사의 이해가 부족한 탓이다. 500여 년 전 달성배씨 조상들은 이곳에 방풍림을 조성했는데 방풍림은 사라진 창포와 함께 역사 속에서 이렇게 공존하고 있다. 

팽나무 개서어나무 숲 중앙 청천상회가 88년 문을 열어 지금껏 마을 점빵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성화봉송로로 이용되었고 당시 군사정권이 초가였던 청천상회를 현대식으로 건축하는 데 지원하고 관리사무소 또한 지었다고 마을사람들은 증언하고 있다.

팽나무 개서어나무 숲 중앙 청천상회가 88년 문을 열어 지금껏 마을 점빵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팽나무 개서어나무 숲 중앙 청천상회가 88년 문을 열어 지금껏 마을 점빵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청천리에서 창포간척지 방향으로 서쪽으로 500여 미터 내려가면 전리마을 사라진 포구 바우배기터가 나온다. 

사라진 포구 바우배기는 청천리가 과거 어촌이었음을 증명한다. 

창포가 간척되기 전까지 바우배기는 군선과 같은 큰 배들이 수로를 통해 서해에서 무안읍으로 가는 최단거리 포구였다. 서해를 통해 읍성이 존재했던 무안읍으로 들어오는 큰 물류는 창포 바우배기를 거쳐 전달되었을 것이다. 

 창포 배우배기를 통해 무안·신안의 수많은 섬에서 수로를 통해 수많은 농민군이 혁명의 길에 나섰을 것이다.
 창포 배우배기를 통해 무안·신안의 수많은 섬에서 수로를 통해 수많은 농민군이 혁명의 길에 나섰을 것이다.

해제의 임치진이나 운남의 다경진에서 군선들이 창포를 통해 무안읍에 들고 나아갔을 것이다. 수백 년 동안 청천리는 무안읍성으로 오가는 선창 중 한곳으로 번성했을 것이다.

대보름이 지난 2월 말 계절이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어가지만 팽나무와 개서어나무 숲에 서있노라니 서해바다에서 창포를 타고 몰아쳤을 한겨울 북서풍의 위력이 느껴졌다. 

팽나무와 개서어나무 숲은 해안가 북서풍을 차단하기 위해 500여 년 전 달성배씨 조상들에 의해 심어졌다고 한다. 

팽나무와 개서어나무 숲은 바다와 육지의 경계로 청천리의 융성번영을 담고 있다.

팽나무와 개서어나무 숲은 바다와 육지의 경계로 청천리의 융성번영을 담고 있다.
팽나무와 개서어나무 숲은 바다와 육지의 경계로 청천리의 융성번영을 담고 있다.

그 수로에 배상옥 장군과 장군이 이끌었던 수천 수만 농민혁명군대가 있었다. 창포 배우배기를 통해 무안·신안의 수많은 섬에서 수로를 통해 수많은 농민군이 혁명의 길에 나섰다. 

안타깝게도 잊혀진 수로는 패전의 슬픈 역사를 고스란히 떠안고 침묵하고 있다. 

고막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밀린 동학농민군은 무안읍성을 지나 붉은 고개에서 다시금 참패를 당하고 창포 바우배기에 이르러 대 참패하고 만다. 일본군과 관군은 바우배기에서 퇴로를 차단하며 농민군을 무참히 학살했다. 

세월이 지난 바우배기는 이정표 하나 없고 실개천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실개천 위로 번성했을 무안읍 창포 포구 바우배기가 눈에 겹친다. 

일본군과 관군에 희생되었을 수많은 농민군의 시신이 널브러진 슬픈 바우배기가 다가왔다.
일본군과 관군에 희생되었을 수많은 농민군의 시신이 널브러진 슬픈 바우배기가 다가왔다.

매서운 북서풍을 안고 오갔을 수많은 옛사람들의 모습이 선명해진다. 일본군과 관군에 희생되었을 수많은 농민군의 시신이 널브러진 슬픈 바우배기가 다가왔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창포가 바다로 남았을 상상에 빠져들었다. 수로를 통해 이어질 문명과 물질 그리고 사람들이 그려진다. 

창포는 향후 기회가 온다면 뱃길을 복원하고픈 무안의 소중한 자원이다.

배상옥 장군의 흔적을 찾아 목포시 대양동으로 향했다. 

목포시 대양동은 과거 무안군 삼향면 대월리다. 배상옥 장군은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 동학농민군을 훈련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목포시 대양동. 과거 무안군 삼향면 대월리다. 배상옥 장군은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 동학농민군을 훈련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목포시 대양동. 과거 무안군 삼향면 대월리다. 배상옥 장군은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 동학농민군을 훈련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생가 터도 분명하지 않고 장군이 조련했던 농민군 훈련장은 아파트 단지로 변신하여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동학의 역사는 100여년 세월 속에서 완벽하게 잊혀져 왔다. 배장군 생가복원과 관련해 움직임이 있었지만 목포시에 소재한다는 이유로 무안군청이 외면하면서 한발작도 나아가지 못하고 못했다.

고막포 돌다리. 배상옥 장군이 이끌었던 전남 서남부 농민혁명군은 관군 일본군에 밀려 수없이 강에 수장되었다고 전해진다. 
고막포 돌다리. 배상옥 장군이 이끌었던 전남 서남부 농민혁명군은 관군 일본군에 밀려 수없이 강에 수장되었다고 전해진다. 

다시 발길을 돌려 함평 고막포로 향했다.

30분 가까이 차로 달려 나주성 함락을 위해 농민군이 관군 일본군과 일전을 벌인 고막포 돌다리에 도착했다. 

함평 고막포 돌다리. 수많은 농민군이 희생되었다는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함평 고막포 돌다리. 수많은 농민군이 희생되었다는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이곳에서 배상옥 장군이 이끌었던 전남 서남부 농민혁명군은 관군 일본군에 밀려 수없이 강에 수장되었다고 전해진다. 

고막포 돌다리에는 두 개의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먼저 하나는 고려시대 무안 승달산 법천사에 온 원나라 고막대사(원명스님)가 돌 다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다른 하나는 동학농민군이 나주성 수서을 위한 전투를 벌였고 수많은 농민군이 희생되었다는 안내판이다. 역사는 시간의 세월이 겹겹이 쌓인 스펙트럼이다.

 고려시대에는 무안 승달산 법천사에 온 원나라 고막대사(원명스님)가 돌다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역사는 시간의 세월이 겹겹이 쌓인 스펙트럼이다.
고려시대에는 무안 승달산 법천사에 온 원나라 고막대사(원명스님)가 돌다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역사는 시간의 세월이 겹겹이 쌓인 스펙트럼이다.

발길을 다시 무안읍으로 돌려 무안읍 불무다리에 도착했다. 

지금 모습대로라면 누군들 이곳에 다리가 있으리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불무지는 매립되어 공원과 아파트 단지가 되었고 무안천은 복개되었다.

김응문 일가 생가 앞에 세워진 동학농민혁명지도자 현창비
김응문 일가 생가 앞에 세워진 동학농민혁명지도자 현창비

1894년 말 불무다리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붙잡힌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시체가 겹겹이 시루떡처럼 쌓였다고 전해진다. 

고막포 전투 이후 각지에서 붙잡힌 수많은 농민군이 불무다리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고막포 전투 이후 각지에서 붙잡힌 수많은 농민군이 불무다리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고막포 전투 이후 각지에서 붙잡힌 수많은 농민군이 불무다리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몽탄면 접주 김응문 일가가 처형된 장소다. 역사를 거슬러 돌아간다면 '무안 땅에 발붙이고 사는 누군들 동학의 유족이 아닌 이 있으리'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라진 불무다리와 복개된 무안천이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1894년 말 불무다리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붙잡힌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1894년 말 불무다리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붙잡힌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역사에 근간을 두지 않은 도시계획으로 불무지와 무안천이 사라진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패전의 역사지만 우리가 뼛속깊이 새겨야 할 역사가 동학이다. 동학은 자주와 민주로 달려온 한국 근현대사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동학을 어찌 대하고 있는가? 전쟁사와 역사에 남겨진 인물만을 중심으로 동학을 대하다보니 동학의 시대사상적 의미와 민중들의 삶은 묻혀져 있다. 

배상옥 장군과 동학농민군의 길에 철학을 재정립하고 동학의 철학이 베인 역사가 후대들에게 가르쳐지길 기대해 본다.

동학은 자주와 민주로 달려온 한국 근현대사의 뿌리이다. 배상옥 장군과 동학농민군의 길에 철학을 재정립하고 동학의 철학이 베인 역사가 후대들에게 가르쳐지길 기대해 본다.
동학은 자주와 민주로 달려온 한국 근현대사의 뿌리이다. 배상옥 장군과 동학농민군의 길에 철학을 재정립하고 동학의 철학이 베인 역사가 후대들에게 가르쳐지길 기대해 본다.

2017년 여름 몽탄 모아도서관 아이들과 무안동학 역사를 찾아 나섰던 무안역사문화탐방이 떠오른다. 

역사문화탐방을 마치면서 공교육 차원의 길을 열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리고 지난 시간 동안 음으로 양으로 그 길을 열고자 노력해 왔다. 

세월을 두드려 누군가 동참해주길 간절히 바란다.

◆ 자문(諮問)
- 백창석 전 무안문화원장
- 박석면 무안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저작권자 © 무안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